목록으로
조선 최고의 명당

2026년 2월 12일

조선 최고의 명당

배봉산에서 융릉까지 정조가 아버지의 무덤을 옮긴 이유 1968년, 서울 휘경동 뒷산. 공사 도중 돌로 된 상자 하나가 발견됩니다. 상자 안에는 또 다른 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서 나온 문서가 바로 ‘천릉문(遷陵文)’이었습니다. 왕릉을 옮기며 남긴 기록. 그곳은 바로 사도세자가 처음 묻혔던 자리였습니다.

봉분조차 없던 무덤

당시 사도세자의 묘는 제대로 된 봉분도 없었습니다. 억울하게 뒤주 속에서 생을 마친 세자. 그의 무덤은 조용히 산자락에 놓였습니다. 백성들은 멀리서 산봉우리를 향해 절을 올렸고, 어린 정조 또한 매일 그 산을 바라보며 절을 했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산을 ‘배봉산(拜峰山)’이라 불렀습니다. 봉우리를 향해 절한다는 뜻. 그 이름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따라가지 못한 장례

정조는 아버지의 장례 행렬에 동행하지 못했습니다. 훗날 할아버지의 허락을 받고서야 참배할 수 있었습니다. 묘소를 찾을 때마다 그는 느꼈다고 합니다.
이곳은 결코 묘를 쓸 자리가 아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다짐합니다. 언젠가 왕이 되면 반드시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겠다고.

세손의 공부, 왕의 결단

세손 시절인 1774년, 정조는 풍수를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왕이 된 뒤에도 그 공부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간절히 얻은 아들 문효세자와 사랑했던 후궁 의빈 성씨를 차례로 잃습니다. 비극이 이어지자 그는 결심합니다. 더는 미룰 수 없다고.

1789년, 무덤을 열다

정조 13년, 1789년 10월 4일. 정조는 직접 아버지의 무덤을 열게 합니다. 광중에는 한 자가 넘는 물이 고여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죽어서도 물속에 잠겨 있는 모습. 정조는 가슴을 치며 오열했다고 합니다. 그 장면은 단순한 풍수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슬픔, 그리고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통곡이 겹친 순간이었습니다.

조선 최고의 명당, 융릉

정조는 당대 최고의 지관들과 함께 새로운 터를 찾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경기도 화성의 융릉을 선택합니다. 사도세자의 묘는 이곳으로 옮겨졌습니다. 이듬해, 정조는 기다리던 왕자 순조를 얻게 됩니다. 정조는 모든 것이 아버지의 덕이라 여겼습니다.

30km의 길, 13번의 참배

한양에서 융릉까지는 30km가 넘는 거리. 정조는 그 길을 무려 13차례나 직접 참배했습니다. 가마 대신 말을 타고 향했던 길. 왕이 아니라 한 아들로서의 여정이었습니다. 그 효심은 자연스럽게 백성을 향한 마음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양한 위민 정책과 개혁으로 조선을 다시 일으키고자 했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마음이 만든 나라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긴 결정은 단순한 풍수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깊은 마음, 억울함을 바로 세우려는 의지, 그리고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다짐. 그 마음이 조선을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단단하게 이어가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배봉산에서 융릉까지. 한 아들의 절과 눈물이 역사를 움직인 길이었습니다.
관련 영상
관련 영상 보기
목록으로

본 콘텐츠는 인읽역이 직접 기획·제작한 자체 역사 교육 자료이며, 모든 저작권은 인읽역에 있습니다.
무단 복사, 캡처, 재편집, 재배포, 재업로드 및 2차 가공을 금합니다.

인읽역은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채널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역사 교육 콘텐츠 확장에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