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2월 11일
세종대왕릉은 왜 파묘되어 여주로 옮겨졌을까
세종은 생전에 아버지 태종의 능인 헌릉 근처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소헌왕후를 헌릉 서북쪽에 장사지냈고,
1450년 승하한 뒤 그 곁에 합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장례 직후, 뜻밖의 이야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당대 이름난 풍수가 최양선은
이 묘터를 두고
후손이 끊기고 장남을 잃을 자리라고 말했습니다. 대신 정인지 등은 이를 요망한 말이라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세종은 크게 개의치 않고 웃어 넘겼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이후의 왕실사는 묘하게 그 말과 겹쳐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어진 왕실의 비극
세종은 많은 자식을 둔 임금이었습니다. 장자 문종은 뛰어난 자질을 갖추었지만 세자 시절부터 지병이 있었고, 부모의 삼년상을 연달아 치르며 건강이 크게 악화됩니다. 즉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차남 세조(수양대군)가 결국 조카의 왕위를 빼앗습니다. 단종은 영월에서 생을 마감했고, 세종의 다른 아들들 역시 권력 다툼 속에서 희생됩니다. 이후에도 비극은 이어졌습니다.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 예종의 장남 인성대군 등 잇따른 요절이 이어졌습니다. 예종은 결국 생각하게 됩니다. 혹시 묘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1469년, 세종 능의 파묘
예종은 결단을 내립니다. 1469년, 세종의 능을 열어 확인하도록 명한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관을 잠길 만큼 물이 고여 있었고, 수의는 썩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길지가 아니라는 해석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능을 옮기기로 결정합니다.새 자리, 여주 영릉
영릉 지금의 경기도 여주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이미 다른 이의 묘역이었습니다. 충희공 이인손의 묘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의 가문은 조정에서 세력을 지닌 집안이었습니다. 예종은 이인손의 아들 이극배를 불러 사실상 양보를 요청합니다. 결국 묘는 다른 곳으로 이장됩니다. 전해지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파묘 과정에서 노란 비단이 발견되었고, 그 위에는단지대왕이 영원히 잠들 자리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는 전언입니다. ‘단지대왕’은 한쪽 다리가 불편했던 세종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공식 기록은 아니지만, 세종의 건강 상태에 대한 추정과 맞물려 전해지는 설화입니다. 또 이런 문구도 있었다고 합니다.
새 주인이 오거든 연을 날려 줄을 끊고, 연이 떨어진 곳에 내 묘를 다시 쓰라.연은 서쪽 10리 떨어진 지금의 여주 능산면 신지리 부근에 떨어졌고, 이인손의 묘는 그곳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그 지역은 훗날 ‘연당’이라 불리게 됩니다.
우연일까, 흐름이었을까
또 하나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인손의 묘터를 잡아준 풍수가는 재실도 짓지 말고, 돌다리도 놓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후손들은 가문의 번성을 기리며 재실을 짓고 돌다리를 놓았습니다. 마침 세종의 새 묘터를 찾던 지관 안효례는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피해 그 재실로 향했고, 불어난 냇물을 돌다리로 건너면서 그 터를 눈여겨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세종은 지금의 여주 영릉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헌릉에서 영릉까지
세종은 생전에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국가 제도를 정비하며 조선의 기틀을 세운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는 왕실의 비극을 겪은 뒤 결국 능까지 옮겨야 했습니다. 헌릉에서 여주 영릉으로. 풍수의 경고, 권력의 격랑,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겹쳐 오늘의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명당이 왕을 기다린 것일까요. 아니면 왕의 존재가 그 터를 특별하게 만든 것일까요. 지금 여주 영릉은 세종과 소헌왕후가 나란히 잠들어 있는 자리입니다. 굽이진 역사 끝에 도달한 곳. 그곳에서만큼은 오래도록 평안하길 바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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